가족과 개인의 갈등: 핵심 주제의 중심
『모순』의 중심 서사는 주인공 안진진을 통해 가족 내의 갈등,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 그리고 그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자녀의 혼란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양귀자는 ‘가족’이라는 단위가 개인에게 어떻게 모순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진진은 겉보기에 평범한 청춘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부모의 이혼과 그로 인해 생긴 정체성 혼란, 외로움,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아버지를 부정하며 살아가면서도 그 안에 남겨진 부성애에 대한 갈망은 진진의 언행 속에 끊임없이 드러난다. 어머니와의 갈등 또한 단순한 세대 차이가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 인간관계에 대한 시각에서 기인한 복합적인 충돌로 읽힌다. 양귀자는 이를 통해 가족이라는 제도가 인간에게 미치는 양면적 영향, 즉 안식처이자 상처의 근원이 되는 ‘모순’을 강조한다.
일상 속 상징들: 컵, 버스, 사진의 의미
『모순』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상적 사물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주제의식과 연결된 중요한 상징들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컵은 소설 초반부에서 깨어지는 장면을 통해 인물들의 관계의 균열을 상징한다. 컵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충격에 쉽게 깨지듯이, 주인공의 가족이나 인간관계도 사소한 오해나 상처로 금이 가고 부서진다. 또한 버스는 진진의 일상과 삶의 리듬을 상징하는 동시에, 고정된 목적지를 향해 가는 듯하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마주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이는 진진이 만나는 인물들과의 관계 변화를 암시하며, 삶이라는 여정에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관계’와 ‘선택’을 의미 있게 담아낸다. 마지막으로 사진은 과거를 기록하는 동시에 왜곡하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진진은 어릴 적 찍힌 가족사진을 보며 기억 속의 행복과 현실의 괴리를 느낀다. 사진은 과거의 한순간을 고정시키지만, 그 순간에 대한 해석은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진실’과 ‘기억’의 모순을 드러낸다.
여성 서사의 진화와 정체성 찾기
양귀자의 『모순』은 1990년대 한국 여성 문학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주인공 안진진은 전형적인 희생적 여성상이 아닌, 내면의 갈등과 성장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당시 여성 문학이 단순한 피해자 서사를 넘어서 주체적인 인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진은 연애, 가족, 사회생활 등 다양한 측면에서 흔들리며 때로는 모순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선택들은 삶을 살아가는 개인의 현실적인 고민이며, 이 과정에서 진진은 점차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직면하고 받아들인다. 작가는 진진을 통해 기존의 이상화된 여성상에서 벗어나, 현실 속에서 갈등하고 선택하며 성장하는 여성을 입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접근은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독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여성의 자아 탐색이라는 문학적 주제를 대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양귀자는 '모순'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여성 정체성의 다면성과, 그것이 드러나는 삶의 여러 층위를 정교하게 묘사한다.
『모순』은 단순한 가족 드라마나 연애소설이 아닌, 일상 속에서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감정의 충돌과 가치관의 충돌을 담아낸 깊이 있는 작품이다. 양귀자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사건들을 통해 인간 내면의 모순을 포착하고, 그 모순이 어떻게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지를 섬세하게 풀어냈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 속 모순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