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시노 게이고의 『가공범』은 단순한 범죄 추리소설을 넘어, 인간 심리의 어두운 이면과 도덕적 회색지대를 치밀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가짜 범인을 설정하고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가해자와 피해자, 진실과 거짓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탐구한다. 본 글에서는 『가공범』을 상징주의적 관점, 주요 인물의 내면 분석, 그리고 사회적 주제의식이라는 세 가지 축을 통해 깊이 있게 해석해 본다.
상징주의로 읽는 『가공범』
『가공범』이라는 제목 자체가 상징적이다. ‘가공(架空)’이라는 단어는 허구, 가짜를 뜻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만든 ‘가공의 현실’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스로 만든 거짓말 안에 갇히고, 그 안에서 진실처럼 행동하며 삶을 이어간다.
주요 상징 중 하나는 ‘뉴스와 미디어’다. 언론은 진실을 알리는 도구가 아니라, 사건을 부풀리고 왜곡하는 수단으로 묘사된다. 이는 사회가 진실보다 자극적인 이야기와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현실을 상징한다. 또한 인물들이 사용하는 가면(페르소나)은 단순한 위장이 아닌, 사회적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으로 나타난다.
하가시노는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끊임없이 던진다. 가공의 범인을 설정하는 것이 단순한 범죄 행위가 아닌, 사회 구조와 인간 심리의 결과물임을 암시하며, 독자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해 사고하게 만든다.
인물분석: 이중성과 감정의 흐름
『가공범』의 중심 인물들은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듯 보이지만, 내면에는 복잡한 감정과 갈등을 안고 있다. 주인공 ‘사카이’는 애초에 악의를 품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점차 상황에 휘말리며 자신의 존재를 지워나간다. 그는 자기기만과 죄책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물이다.
또 다른 인물 ‘야마구치’는 피해자의 입장을 통해 사건을 쫓지만, 점차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하게 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처럼 작가는 인물들을 단순한 선악 구조로 나누지 않고, 회색지대 속에 배치함으로써 인간의 심리를 더욱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인물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중요한 감정이다. 그들은 법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마음속에는 분명한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인간이 윤리적 존재임을 상징하며, 법과 윤리 사이의 간극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인물들의 이러한 복잡한 감정은 독자에게 강한 몰입감을 제공한다.
주제의식: 진실, 책임, 그리고 사회의 얼굴
하가시노 게이고는 『가공범』을 통해 진실의 상대성과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규정하려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부정하고, 오히려 각자가 지닌 ‘부분적 진실’이 전체 이야기의 조각임을 강조한다.
작품 속 사회는 감정적으로 소비되는 뉴스, 자기합리화, 그리고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구성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가공의 범인’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며, 결국 우리는 모두 그 범죄의 일부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독자 자신도 작품 속 세계에 포함되어 있다는 묘한 죄의식을 유발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주제는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거짓말을 한 사람만이 아닌, 그것을 방관하고 소비한 사회 모두가 책임을 나눠야 한다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가공범』은 단순한 사건 해결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유도하는 작품이다.
『가공범』은 ‘진실’이라는 단어의 절대성과 권위를 해체한다. 하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을 통해 진실이란 주관적이며, 사회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독자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 심리의 다층성과 사회 구조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공범’일 수 있으며,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